텅 빈 너른 가을 들판에 서서

  • 등록 2023.10.22 19: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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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텅 빈 너른 가을, 들판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며...

 

 

 

뜨겁고 무더운 날들이 소리없이 사라지더니, 짧은 가을이 우리곁에 와 있습니다. 

 

그 마저도 한두 달 우리 곁에 머물더니 이내 영하권의 날씨가 되었고, 아직은 만추지절이라 각양각색의 고운 단풍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지만, 이미, 강원도와 경기북부는 첫 서리가 내리고, 가을걷이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과 발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가을 밭의 배추와 무는 무척 차가워진 날씨에 쑥쑥 자라고 있어 곧 김장철이 되어 우리민족 음식의 정수인 오랜 기간 절였다가 먹는 발효음식 중 하나인 배추김치와 깍두기 등이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갈 계절의 문 앞에 와있습니다.

 

황금 벼가 가득했던 가을 들판은 과거에는 두레에 의존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모여 함께 벼를 베고, 볏단을 논에 쌓아 만들던 볏가리 후,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탁주를 나누어 마시던 탁배기의 정취는 사리진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농부 홀로 트랙터를 이용하여 벼 베기와 동시에 탈곡, 그리고 사료용 짚단까지 처리가 가능한 기계농이 주된 상황이라 과거 탁배기를 나누던 정취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갖가지 곡식으로 가득했던 논과 밭은 이제 텅 빈 자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추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대지는 땅바닥에 떨어진 벼 이삭과 콩, 참깨, 들깨 등을 먹으려는 수 백마리 철새들의 놀이터이자, 먹이터가 되어 가고 있고, 농부들은 봄부터 지켜온 농토를 그들에게 조용히 내어주고, 깊은 겨울의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내 들판은 모든 날짐승과 들짐승의 천국이 되어 갑니다.

 

텅 빈 들판에서 저 역시 살아온 날들을 바라봅니다.

 

 

 

2023년이 시작된 지, 바로 어제 같은데 빈 들판에 홀로 서니, 인생사 한순간의 꿈이요, 한순간의 환상이라는 “일장춘몽”이라는 단어가 조용히 떠오릅니다.

 

그 짧은 시간들을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학습을 시작하고, 초,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소위 명문대학을 나와, 그 기득권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학벌이, 그 부가, 그 명성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인 양 죽음에 이를 때 까지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시간에 쫓기듯 남과 경쟁하며, 오로지 자신의 가족의 영달을 위하여 살려고 노력하면서 자녀들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라는 환상에 빠져 이내 자신의 죽음에 이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지정하고, 한달간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시기로 장하여 놓았고, 이와 동시에 돌아가신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간으로 정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령성월”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기도하는 특별한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위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특히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이 정화되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이들의 희생과 선행을 통하여 돌아가신 분들이 천국에 이르는 기도와 실천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령성월” 중 “위령의 날”을 통상 11월 2일에 지키는 것과 바로 전날인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키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가톨릭신자들이 매 미사 때마다 바치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표현되는 통공의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 즉, 세상에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하느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는 성인들, 그리고 아직 고통을 겪는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 안에서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위령성월”이 11월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998년 클뤼니 수도원 제5대 원장인 오딜로(Odilo)가 자신이 관할하는 모든  수도자들에게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시간 전례를 노래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부터 “위령성월”이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이 정한 전통이 가톨릭교회 내에 널리 퍼지면서 11월 한 달 동안 위령기도를 바치는 관례가 정착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 레오 13세(재위 1878~1903), 비오 11세(재위 1922~1939)가 위령성월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면서 위령성월은 가톨릭 전례력에서 더욱 굳은 지위를 얻게 된 전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12월이 한 해의 마지막 달이지만, 가톨릭교회 전례력 상으로는 11월이 연중 마지막 달이라는 점도 “위령성월”이 11월에 지켜지게 된 하나의 배경이고, 연중 마지막 기간인 11월에 위령성월을 보냄으로써 종말에 성취될 구원과 우리 삶의 선한 끝맺음을 미리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교회의 전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텅 빈 들판으로 변해가는 대자연과 온 산이 만산홍엽으로 변화한 뒤 땅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쓸쓸한 11월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죽음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불교에서도 수륙재라고 하여 모든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수륙’이라는 단어로 인해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물과 육지에서 죽은 여러 영혼들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천혼의식’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만, ‘천지명양수륙재’,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 ‘수륙무차평등재’등으로 불리어 왔기에 ‘수륙재’라고 약칭하게 되었다 생각해 봅니다.  ‘천지명양수륙재’를 보면 하늘 땅, 산 자의 세계인 양계와 죽은 자의 세계인 명계, 그리고 물과 뭍(육지)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수륙재를 단순히 ‘물과 뭍에서 죽은 영혼들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천도의식’이라고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수륙재는 505년 중국 양나라 초대 황제인 양무제에 의해 금산사에서 처음으로 설행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현재 전해지는 수륙재 대본이 등장하는 시기는 11세기 이후 송나라 때의 일이며, 양무제 때 처음 설행할 때는 나라 임금이 육도사생의 고통받는 뭇 영령을 구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12세기 말 송나라 사명 사호 스님은 금산사에서 수륙법회가 성행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고 밭 100묘를 시주하여 네 가지 큰 은혜를 갚기 위해 네 계절에 수륙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수륙법회가 성행해 전국에 널리 보급되자, 전쟁 이후 조정이나 민간에서 극락으로 건너가게 하는 초도(超度)법회로서 수륙법회가 항상 행해졌고, 심지어 수륙재를 하지 않으면 불효라고 하여 집안의 제사로도 수용되게 되었습니다.

 

11세기 말 수륙재에 대한 의례문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의례문에 의해 수륙재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전하며, 고려 성종 때에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문에 ‘무차수륙회’라는 명칭과 그 폐단이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10세기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수륙재가 널리 설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수륙재는 ‘무차법회(無遮法會)’라고 하여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고루 음식을 나눠주고 진리를 들려주는, 오늘날 대만 등지에서 행해지는 만연법회의 성격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수륙재라는 이름으로 설행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 건설로 인해 희생된 고려조 왕 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5년 2월 보름, 개성의 관음굴, 삼척의 삼화사, 남해의 견암 등지에서 왕 씨들의 추후천도를 위하여 수륙재를 개설하였다는 기록이 전하여 오고 있으며, 이듬해 5월에는 부역 과정에 사망한 역부들의 혼령을 천도하기 위해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를 개설하였고, 1397년에는 서울 진관사에 수륙사찰을 건립해 선왕선후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수륙재를 상설화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어제인 21일에 진관사에서는 “정전 70주년,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 기원"을 위한 수륙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서울 은평구에 소재한 진관사의 수륙재의 복원은 현대에 이르러 1970년대 후반, 선왕선후의 칠칠재 등 국행수륙재를 설행했던 서울 진관사의 자운 스님에 의해서 수륙재가 복원되어 설행되기 시작하게 되었고, 조선 초 왕 씨를 위한 수륙재 설행도량이었던 동해 삼화사에서도 2000년대 이후 전통수륙재를 복원해 현재도 매년 봉행하고 있으며, 2013년 12월 문체부에서는 서울의 진관사, 동해의 삼화사, 경남 마산의 백운사에서 설행되는 수륙재에 대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무형문화재로써의 전승과 기도를 설행하고 있습니다.

 

수륙재의 내용은 과가 수륙재의 모습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1432년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일주일 동안 수륙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에 1천여명의 스님들에게 음식과 보시를 주고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음식을 대접하는 “무차수륙재”의 형식으로 열리거나, 3일 또는 7일 낮밤으로 수륙재를 설행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다라서, 불교의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살았던 모든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모든 영혼을 위한 기도를 담당했던 재례를 수륙재라 합니다.

 

며칠 전 저희 가족과 14년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고, 비록 강아지였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중 가장 중요한 한자리를 담당하였던 “루이”라는 이름을 지닌 저희 반려견이 몸이 아픈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황망하게 떠났습니다. 루이는 2010년 8월 26일,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함께 7년여를 살다가, 한국에 와서 또 다시 7년을 저와 함께 산 우리 가족입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 루이는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주인이 잘 대하여 주지 못해도, 떠나지 않았고, 기꺼이 섭섭함을 잊어 주면서 항상 저를 용서하고 홀로 있는 제 곁에서 24시간을 그저 조용히 저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일을 하느라 어쩌다 밖에서 밤 늦게라도 돌아오면 혼자 지낸 그 지루한 시간들을 금방 잊고, 꼬리를 흔들며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던 가족이자, 반려 견이며, 제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그리운 시간입니다.

 

 

인간들은 수만 년 전부터 강아지를 길들여 가까이 두었습니다. 강아지는 인간과 친근하게 지내며 우리 역사와 예술 속 여러 장면에도 등장했습니다. 강아지들은 초기 동굴 벽화와 고대 그리스 도자기, 중세 태피스트리와 조각상, 초상화에도 등장합니다. 미술사에서 강아지는 충성심, 보호, 동반자의 자질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다루어지기도 하였던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서 이미 한국도 1,000만의 반려견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중세 여인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과거 귀족 여성의 무덤을 장식했던 것으로서 중세 시대 당시 귀족들이 입었던 복식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조각상의 발 아래에는 품종을 식별할 수 없는 강아지 조각이 놓여있습니다. 여기서 강아지는 그 무덤의 주인이 가정에 헌신했던 인물임을 상징합니다.

 

중세에 이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작품 속 여성의 정절과 충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강아지를 등장시켰습니다.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아르놀피니의 결혼”에는 혼인을 맹세하는 부부의 발치에 강아지가 함께 서 있습니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가 펼친 작품세계에서도 최고의 초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인 “찰스 1세의 다섯 아이들”은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화풍으로 궁중 초상화가였던 반 다이크의 실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림 중앙에는 한 소년과 그의 개가 있습니다. 그 소년은 찰스 1세의 후계자로 나중에 찰스 2세로 즉위하게 될 찰스 왕세자입니다. 그 소년의 개는 초대형 강아지이자 역사상 오래된 품종 중 하나인 ‘마스티프’입니다. 마스티프는 로마 시대 때부터 왕실 경비견으로 계속해서 사랑받았던 종입니다. 그렇기에 충성심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지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왕실의 권력을 지키는 마스티프의 머리 위에 찰스 왕세자가 손을 얹고 있습니다. 이는 이 대형견의 주인이 차후 나라를 다스릴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가장 뛰어나고 혁신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게릿 다우” 또한 강아지를 그림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세로 16.5센티미터, 가로 22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작은 그림 속에는 항아리에 기댄 강아지가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달콤한 꿈을 꾸다 방금 잠에서 깬 듯 눈을 게슴츠레 뜬 강아지 옆에는 슬리퍼와 나뭇가지, 항아리 등 일상적인 물건들이 놓여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장르 중 하나인 바니타스 정물화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바니타스는 삶의 덧없음과 도덕성을 상기시킴으로써 세속적 즐거움과 도덕성의 균형을 함께 추구한 장르였는데, "휴식하는 개"는 이 장르에 속하지만 그림 속 강아지와 사물들이 내포한 정확한 상징적 의미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인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에서는 “트리스트럼과 폭스”는 강아지 두 마리가 주인공입니다. 그림 오른쪽의 ‘트리스트럼’과 왼쪽의 ‘폭스’는 게인즈버러와 특별한 유대감을 가졌던 동물입니다. 게인즈버러는 감각적인 구도와 붓놀림으로 강아지들을 생기 있게 묘사했습니다. 폭스의 눈은 반짝이며 입은 살짝 벌어져 있습니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코와 눈, 입은 그 형태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부드럽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그려진 강아지의 털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트리스트럼의 어두운 빛깔의 털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묘사되었습니다.

 

인간과 강아지 사이에는 오랜 역사와 이야기가 함께 전하여 집니다. 결혼과 같은 기쁜 순간에도, 기록으로 남길 초상화에도, 심지어 죽은 후 무덤에도 강아지는 함께 자리했습니다. 인간의 충직한 종 이자, 친구이기도 한 강아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 곁에서 기쁨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변화에서 강아지의 역할을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제 삶 구석구석에서 함께했던 반려 견 “루이”의 죽음은 큰 슬픔과 황망함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며칠전 조용한 가을의 끝자락에 반려견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였고, 한지에 곱게 쌓은 유골을 한지 유골함에 보관하여 집에 가까이 두고, ‘너희는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라”는 성서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당분간 가톨릭에서 정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예로서 연도와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 11월의 위령성월에 기도와 함께 지내려 합니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이란 말은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는 것이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뜻...

 

어떤 문제를 편견을 갖고 한 단면만 보는 게 아니라 다각도로 생각할 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잘못을 피하게 되고 개혁의 대세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정령이 지나치게 번거롭고, 구체적이면 천변만화하게 변하는 실제적 상황국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이때의 대응방식은 ‘가만히 있음. 즉, 수중(守中)입니다. 즉 기초와 원칙, 근본을 지키면 온갖 변화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불변不變으로 만변萬變에 대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癒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아니하여 만물을 풀 강아지처럼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아니하여 백성을 풀 강아지처럼 본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나 굽힘이 없고 움직이면 힘이 더욱 생겨난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는 것이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

 

노자는 사마천에 따르면 춘추시대 말기 초楚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는 담聃이다. 주周나라 왕실에서 도서를 관장하는 일을 하다가 주의 덕이 쇠약해지자 함곡관函谷關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노자>는 노자 학설을 집대성한 책 이름으로 전문 약 5400자, 81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우리는 <노자 도덕경>이라고도 부릅니다. <노자>의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는 것이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글귀는 ‘다언多言’과 ‘불언不言’을 대비해 정령의 번다 함을 가리킵니다.

 

삭궁(數窮)은 여러 차례 실패, 수중(守中)은 고요함(虛靜)을 지키는 것을 일컬음이며, 노자는 ‘풀 강아지(추구芻狗)’와 ‘풀무(탁약橐籥)’, 두 개의 비유를 통해 이런 이치를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추구’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한 풀로 만든 강아지입니다. 제사가 끝나면 버리거나 소각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대해 어떤 애증이 없습니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편애를 하지 않아 만물을 대할 때 풀 강아지 마냥 대하고 만물은 스스로 생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인도 편애가 없어 백성을 대할 때 풀 강아지처럼 대하고, 백성들은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쉬는 존재라 생각합니다.

 

성인은 하늘과 땅 사이를 하나의 큰 풀무로 비유하여 그것은 비어 있으되, 고갈되지 않아 바람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커지고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이 때문에 정령이 번다하면 잇따라 실패해 조용히 아무것도 아니한 만 못하다는 것을 가르킵니다.  

 

공자는 언론을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에 관계되는 것으로 끌어올려 고도로 중시했는데, 공자는 ‘유위(有爲)’ 각도에서 출발하고, 노자는 ‘무위(無爲)’를 말하지만 정치는 말이 많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서로 일치합니다. 말 하고자 하는 ‘수중(守中)’의 ‘중(中’)은 겸허하다는 ‘충(沖)’을 통해 속마음의 비어 있는 고요함(허정虛靜)을 가리킵니다. 유가의 이른바 중정(中正)이나 중용(中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불편불의不偏不倚)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본질은 태어나고 죽는데 있습니다.

 

누구나 태어나고, 죽음으로써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즉, 우리의 눈에서 사라집니다. 저희 부모님도 이미 돌아 가신지가 오래되었고,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 “루이”도, 저 역시도 앞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요즈음 세상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말이 너무 많고, 이유도 많습니다.

 

어느 야당 대표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이나, 지지율이 고공 수직 낙하하는 여당과 대통령에 대한 수없이 많은 말들도, 본인 스스로 만든 일들입니다. 잘못 알려진 부분은 바로 세워야 하겠지만,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이야기들이 왜곡되거나, 주변의 사람들이 말로써 스스로를 더 어렵게 합니다. 말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정말 조용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은 또다른 시작이나, 죽음에서는 말이 없는 것이 본질입니다. 하고 싶은 말도, 하려고 하는 말도, 못다한 말도, 억울한 말도, 자랑하고 싶은 말도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하루를 조용히 묵상하고, 묵언으로 부터 위령성월은 시작되고, 수륙재도 설행되는 것이며, 추수 후 텅 빈 들판이 자연으로 회귀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죽음으로써 비로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텅 빈 늦가을 들판을 다시 바라보면서 고요한 가운데 자신의 본 모습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이세훈 논설위원 /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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