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기자 | 김나은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이 문장은 더 이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화선지 위에 유채가 스며들고, 먹의 호흡 위로 색이 겹쳐지는 순간, 전통은 과거의 형식이 아닌 현재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김나은 작가는 ‘화선유채서화’라는 융합 기법을 통해 동양 서화의 정신과 서양 유채의 물성을 하나의 화면에 공존시킨다. 이는 단순한 재료 혼합이 아니다. 종이의 성질, 색의 무게, 시간의 층위를 끝까지 이해한 뒤에만 가능한 고난도의 회화 실험이다.
화선유채서화, 김나은의 방식
화선지는 흡수가 빠르고 섬세하다. 반면 유채는 본래 캔버스와 두꺼운 색층을 전제로 한다. 이 둘의 만남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김나은 작가는 그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표현의 에너지로 전환한다.
밑처리로 종이의 숨을 조절하고, 유분을 절제해 번짐을 통제하며, 붓질의 속도를 낮춰 색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도록’ 기다린다. 그 결과 화면에는 칠해진 색이 아니라 머문 색이 남는다.
판다, 현대의 민화가 되다.
작품 속 판다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먹을 머금은 붓으로 그려진 눈동자에는 인간의 감정이 깃들고, 유채로 쌓아 올린 몸체에는 생명의 온기가 남아 있다. 대나무의 초록은 자연의 생동을, 배경의 번짐은 여백의 사유를 불러온다.
이는 민화가 지녔던 길상·평안·회복의 상징이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된 장면이다. 전통이 귀엽고 친근해지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성숙해지는 지점이다.
글씨와 그림, 나뉘지 않는 화면
김나은의 화면에서 글씨는 설명이 되지 않고, 그림은 장식으로 남지 않는다. 서書는 화면의 호흡을 이끌고, 화畵는 그 호흡에 색을 입힌다.
여백은 비어 있지 않으며, 침묵은 의미가 된다. 이러한 구성은 ‘서화동원書畵同源’의 원리를 현대적으로 확장한 결과이며, 화선유채서화가 단순한 기법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태도임을 증명한다.
“전통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 김나은의 답은 분명하다. 전통은 재료를 바꿀 수 있고, 형식을 넘나들 수 있으며,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 화선유채서화는 그 가능성을 실제 작품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이 화면 앞에서 관람자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전통은 이미, 우리보다 한 발 앞서 현재에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화선유채화和宣油彩畵란 무엇인가
화선유채화는 전통 화선지和宣紙 위에 유채 물감Oil Color을 사용하는 현대 융합 회화 기법이다. 본래 유채는 캔버스와 린시드 오일을 전제로 하지만, 화선유채화는 그 관습을 깨고 먹과 색, 스밈과 층위를 동시에 다룬다.
화선유채화의 미학적 의미는 분명하다. 이는 전통을 재현하는 기법이 아니라, 전통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수묵의 정신을 지키면서도 현대 회화의 색채 감각과 서사를 품어, K-민화·K-서화가 세계 미술 언어로 확장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된다.
화선유채화란, 화선지의 스밈 위에 유채의 색을 얹어 동양의 여백과 서양의 물성을 하나의 화면으로 엮어내는 동시대적 융합 회화라 할 수 있다.
작가노트 | 김나은 | 화선유채서화 명인
나는 글씨를 쓰되, 뜻을 가두지 않으려 한다.
그림을 그리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화선지 위에 유채를 얹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번질 것을 알면서도 붓을 올려야 하고,
멈출 것을 알면서도 색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번 작품의 판다는
강해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 존재다.
가진 것을 지키며, 오늘을 충분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 서화가 누군가에게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가 되기를,
마음을 내려놓는 한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