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2026년 2월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미·러 간 마지막 핵 통제 장치인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의 만료를 불과 15시간 앞둔 시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잇달아 연결하며 냉전 이후 가장 위험했던 ‘안보 절벽’의 중재자로 나섰다.
전문가들은 이날의 연쇄 통화를 국제 정치의 무게중심이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에서 중국발 ‘실용적 다자주의’ 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2026년 2월 5일 0시를 기해 세계는 핵비확산의 법적 규제가 사라지는 ‘무법지대’에 놓일 위기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3자 협상 요구와 러시아의 연장 제안이 평행선을 달리던 상황에서 시 주석은 특유의 ‘전략적 안정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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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對)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화상 회담에서 시 주석은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를 강조하며 러시아의 입장을 청취하는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의 명분을 공유하며 양국의 전략적 공조가 글로벌 안정의 핵심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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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對)미국: 푸틴과의 회담 직후 이어진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는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시 주석은 미국이 우려하는 핵 확산 방지에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치면서도, 이를 경제 및 기술 현안과 연계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이날의 연쇄 통화는 중국 외교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와는 경제적 ‘혈맹’을 과시했고, 미국과는 철저한 ‘관리’와 ‘거래’에 집중했다.
- 중·러: 역대 최대 교역과 가치 동맹
2025년 중·러 교역 규모는 총 $2,281$억 달러를 기록하며 3년 연속 2,000억 달러 고지를 넘었다. 이는 단순한 무역 확대를 넘어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하는 거대한 경제 블록의 탄생을 의미한다. 시 주석은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와 함께 ‘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글로벌 거버넌스’를 주장했다.
- 미·중: ‘대두(大豆)’와 ‘대만(臺灣)’ 사이의 거래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직후 자신의 SNS를 통해 중국의 미국산 대두 2,000만 톤 구매 및 에너지 수입 확대를 성과로 홍보했다. 그러나 시 주석은 경제적 양보의 이면에 “대만 문제에 대한 무기 판매 중단”이라는 강력한 레드라인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이는 안보 현안을 경제적 카드로 제어하려는 중국식 실용주의의 정점이었다.
2월 4일의 성과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1월 한 달간 베이징은 서방 정상들의 방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월 한달간 한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우루과이 정상은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미국 우방국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비해 중국이라는 ‘예측 가능한 확실성’에 베팅했다. 왕이웨이 인민대 교수는 이를 두고 “미국이 동맹을 압박할 때 중국은 시장과 안정을 공급했다”고 분석한다.
시 주석은 이번 통화에서 2026년 하반기 선전 APEC 정상회의 개최를 공식화하였으며, 2026년은 중국의 제15차 5개년 계획(2026~2030)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선전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은 명확하다. 중국은 AI, 저궤도 위성, 신재생 에너지 등 미래 기술 표준을 선점하여 미국 주도의 기술 봉쇄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것으로 예상된다.
2026년 2월 4일의 24시간은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중국이 실질적인 세계 안보와 경제의 ‘균형추’로 부상했음을 입증했다. 이제 세계는 이념적 선명성보다 ‘누가 더 안정적인 파트너인가’를 묻는 거래의 시대로 진입했다. 베이징은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답을 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