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특집] 북중 관계 재정립과 ‘9·19 체제’의 퇴조… 동북아 안보 지형의 대전환

- 비핵화 표현의 실종… 달라진 중국의 대북 메시지
- '군사 협력' 공식 언급… 북중 관계의 재조정
- 북러에 이어 북중까지… 북한의 전략적 공간 확대
- 6자회담 시대의 퇴조와 새로운 신냉전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동북아시아 안보 질서가 중대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지난 6월 8일부터 9일까지 이뤄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은 단순한 북중 우호 과시를 넘어, 지난 20여 년간 한반도 외교의 기본 틀로 작동해온 '9·19 공동성명 체제'의 실질적 퇴조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은 북한의 모든 핵무기 및 기존 핵계획 포기, 관계 정상화, 경제협력,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포괄한 역사적 합의였다. 그러나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와 미중 전략경쟁 심화, 북러 군사협력 확대가 맞물리면서 당시의 다자안보 틀은 점차 현실성을 잃어왔다.

 

이번 북중 정상회담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핵화 표현의 실종… 달라진 중국의 대북 메시지

가장 주목받는 대목은 중국과 북한의 공식 발표문에서 '한반도 비핵화' 관련 표현이 사실상 전면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 중국은 북중 정상회담 이후 발표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을 반복적으로 언급해 왔다. 이는 국제 비확산 체제에 대한 중국의 공식 입장을 유지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외교적 균형 장치였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는 '신시대 조중관계', '전략적 소통 강화', '사회주의 위업 수호' 등이 강조됐고, 비핵화 관련 문구는 핵심 메시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 핵 문제 자체보다 전략적 안정과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이는 중국 정부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로 단정하기보다는, 기존의 비핵화 우선 접근법이 현실적 안보 계산 속에서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분석에 가깝다.

 

'군사 협력' 공식 언급… 북중 관계의 재조정

이번 정상회담의 또 다른 특징은 군사 협력에 대한 공개적 언급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에서 외교·법집행·군사 분야 교류 강화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최근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 체결 이후 중국이 북한 문제에서 영향력을 재확인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특히 양측은 올해 '중조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 기념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 조약에는 유사시 상호 원조 조항이 포함돼 있어 냉전기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물론 이번 회담이 해당 조약의 자동 군사개입 조항 발동을 선언한 것은 아니다. 다만 냉전시기 상호원조조약의 상징성을 다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미국·일본·한국 안보협력 강화에 대응하는 정치·외교적 메시지로 읽힌다.

 

북러에 이어 북중까지… 북한의 전략적 공간 확대

북한은 이번 방북 기간 최고 수준의 의전을 제공하며 북중 혈맹의 지속성을 과시했다.

 

금수산 영빈관 행사북중우의탑 참배,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기념식수 등은 단순한 의례를 넘어 양국의 역사적 연대와 체제적 유대감을 대내외에 시각적으로 부각시키는 장치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심화에 이어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 안정까지 확보함으로써 외교적 선택지가 넓어진 셈이다.

 

이달 말 예정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역시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이 회의에서 핵전력 현대화와 재래식 전력 증강을 포함한 국방력 강화 기조가 재확인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노선과 정책 방향은 회의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6자회담 시대의 퇴조와 새로운 신냉전

2000년대 중반만 해도 6자회담은 한반도 문제를 관리하는 대표적 다자안보 플랫폼이었다.

 

한국·북한·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모두 참여하는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동북아 질서는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

 

미국·일본·한국의 안보협력이 제도화되는 반면, 북한·중국·러시아 간 전략적 연대 역시 강화되는 양상이다. 동북아는 점차 두 개의 안보 축이 병존하는 경쟁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형태의 6자회담이 단기간 내 복원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다만 외교 채널 자체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관리와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다자 대화 메커니즘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9·19 공동성명 체제는 법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와 6자회담 중단, 미일한 안보협력 제도화, 북중러 전략 연대 강화 등의 현실 속에서 실질적 효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라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한국 외교의 과제

북중 관계 재조정은 단순한 양자관계 변화가 아니다. 이는 동북아 안보 구조 전반의 재편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억지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 창구를 관리해야 하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또한 과거의 다자안보 틀에 대한 향수에 머물기보다 변화하는 지역 질서 속에서 새로운 위기관리 체제와 외교적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의 평양 방문은 '9·19 공동성명 체제의 공식적 종언'을 선언한 사건이라기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질서가 이미 다른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달 말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어떤 대남·대미 메시지가 제시될지에 따라 동북아 질서 재편의 속도와 방향 역시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신냉전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지금, 한국 외교는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유연한 전략적 사고를 요구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