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국제법·인권 전문기관 Global Rights Compliance(GRC)가 러시아 건설 현장 등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의 노동 실태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하며, 북한의 해외 노동자 파견 시스템이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강제노동(Forced Labour) 지표를 모두 충족하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보고서 'A Day in the Life of a DPRK State-Imposed Labourer in St. Petersburg, Russia'는 러시아에서 근무했던 북한 노동자 21명의 증언을 토대로 해외 파견 노동자의 일상을 재구성했다. GRC는 이를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는 조직적 노동 통제 체계로 규정하며 국제사회와 기업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364일 일하고 월급은 10달러"… 국가가 가져가는 노동의 대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도 해외 노동자 파견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전 세계적으로 약 10만 명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GRC는 이러한 해외 노동자 운용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제2375호와 제2397호의 취지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실제 증언을 토대로 가상의 노동자 '금혁'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금혁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평균 14시간 이상 건설현장에서 근무한다. 성수기에는 하루 16시간 가까이 일하는 경우도 있으며, 연간 최대 364일 근무하는 사례도 확인됐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노동의 대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의 명목상 임금은 월 수백 달러 수준이지만, 국가 계획분, 충성자금, 각종 부담금 등이 공제된 뒤 실제 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월 10달러 안팎에 불과한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일부 노동자는 국가가 부과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오히려 채무를 떠안거나 추가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증언했다.
"여권은 압수되고 인터넷도 차단"… GRC "강제노동 지표 11개 모두 해당"
GRC는 이번 조사 결과가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강제노동 11개 지표 모두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여기에는 ▲취약성 악용 ▲기만 ▲이동의 자유 제한 ▲고립 ▲신체적·심리적 위협 ▲협박 ▲신분증 압수 ▲임금 착취 ▲채무 예속 ▲열악한 노동환경 ▲과도한 연장근로가 포함된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도 담겼다.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여권과 신분증을 제출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법적 효력이 없는 복사본만 남겨졌고, 숙소와 작업장 외에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GRC는 노동자들이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채 생활했으며, 인터넷과 통신 이용도 엄격하게 통제됐다고 밝혔다. 숙소 역시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컨테이너나 노후 건물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열악한 위생환경과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됐다는 증언도 보고서에 포함됐다.
가족에 대한 처벌 우려가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
보고서는 북한 당국이 해외 노동자를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지목했다.
조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무단 이탈이나 탈북을 시도할 경우 자신뿐 아니라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작업 현장에는 북한 측 관리와 감시 체계가 상시 운영됐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상호 감시가 이루어졌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자발적 지원처럼 보이지만 실질적 선택권은 제한"
보고서는 상당수 노동자가 해외 파견을 희망하며 비용을 마련하거나 뇌물을 제공하는 사례도 존재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GRC는 이를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북한 내부의 경제난과 정보 접근 제한으로 해외 노동의 실제 환경을 충분히 알기 어려운 데다, 파견을 위해 발생한 채무와 가족에 대한 압박이 결합되면서 노동자가 사실상 노동을 중단하거나 귀국을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일부 노동자들이 국가가 요구하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공식 근무가 끝난 이후 야간에 별도의 일용 노동이나 이른바 '청부'를 수행하는 사례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와 기업의 공급망 점검 필요"
GRC는 북한 해외 노동 문제가 단순한 노동 착취를 넘어 국제 공급망과 기업의 인권 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 문제로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관련 국가와 기업들이 북한 노동력이 공급망에 유입되지 않도록 보다 철저한 인권 실사와 제재 이행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또한 노동자 보호를 위해 ▲안전한 작업환경 보장 ▲적정 임금 지급 ▲과도한 노동시간 개선 ▲가족과의 연락 보장 ▲탈출 희망자 보호 체계 마련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편 Global Rights Compliance(GRC)는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법·인권 전문기관으로, 국제인도법, 국제형사법, 전쟁범죄 조사, 기업 인권실사(HRDD)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번 보고서는 러시아에서 근무했던 북한 노동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외 노동 시스템을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 기준에 따라 분석한 사례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