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 데이(7월 14일). 세계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행진하는 우크라이나 장병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프랑스 시민들은 기립박수로 이들을 맞이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굳게 포옹하며 유럽의 연대를 과시했다.
중동에서 고조되는 긴장,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미국 방산 공급망의 부담, 그리고 유럽 방위산업의 독자 노선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면서 세계 안보 질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 더욱 주목받았다. 과거에는 지역 분쟁이 해당 지역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중동에서 발생한 위기가 동유럽 전장의 방공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여파가 다시 유럽의 방위산업 전략과 동맹 구조를 변화시키는 시대가 됐다.
국제 안보 전문가들은 이를 '글로벌 안보 공급망 시대(Global Security Supply Chain)'라고 부른다.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 방공망 유지
최근 러시아는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장거리 드론을 결합한 대규모 공습을 지속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전력은 미국의 패트리엇(Patriot) 방공 시스템이다.
그러나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미국은 자국 및 역내 미군 기지 방어를 위해 방공 전력 운용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국제 안보 전문가들은 향후 패트리엇 요격미사일 생산과 공급 일정에도 상당한 부담이 발생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한된 생산능력을 가진 첨단 방공체계를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운용해야 하는 현실은 미국의 글로벌 군수 공급망이 구조적인 한계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의 '전략적 선택'
이번 파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유럽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역시 모든 지역을 동시에 책임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유럽, 중동, 인도·태평양이라는 세 개의 전략 전선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를 억제해야 하고, 중국을 견제해야 하며, 중동에서도 안보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여기에 첨단 미사일 방어체계는 생산량이 제한적이다.유럽 입장에서는 미국의 의지가 아니라 '능력' 자체가 한계에 도달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크롱 대통령이 수년간 강조해 온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이 최근 들어 다시 힘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이 추구하는 것은 미국과의 결별이 아니라, 미국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유럽 방산업계, '블릭셈 EXO'로 새로운 도전
이 같은 전략 변화는 곧바로 방위산업계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7월 14일 파리에서는 Airbus Defence and Space, Thales, Safran Electronics & Defense, MBDA Deutschland, 그리고 항공우주 기업 Destinus가 공동으로 '블릭셈 EXO(Bliksem EXO)' 컨소시엄 설립을 위한 의향서(LOI)에 서명했다.
컨소시엄의 목표는 유럽 최초의 독자적인 외기권(Exo-atmospheric) 탄도미사일 요격체계를 개발하는 것이다.
참여 기업들은 앞으로 3개월 안에 본계약 체결을 추진하고, 오는 8월부터 공동 엔지니어링에 착수한 뒤 2027년 첫 기술 실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패트리엇과 THAAD, 이스라엘의 애로우(Arrow)와 같은 상층 미사일 방어 능력을 유럽 자체 기술로 확보하려는 첫 대규모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신무기 개발을 넘어 유럽 방산 공급망의 자립과 전략적 주권 확보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방산을 넘어 우주 안보 경쟁으로
주목할 점은 차세대 미사일 방어의 무대가 지상이 아닌 우주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기권 요격체계는 대기권 밖에서 탄도미사일을 파괴하는 기술로, 극초음속 미사일과 신형 탄도탄 위협이 증가하는 미래 전장에서는 필수적인 핵심 능력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이미 관련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유럽 역시 독자적인 우주 기반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21세기 안보 환경에서는 하나의 지역 분쟁이 다른 지역의 방산 공급망과 군사 전략, 외교 질서까지 연쇄적으로 흔든다. 중동에서 높아진 긴장은 우크라이나의 방공 수요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유럽의 방위산업 재편과 독자적 미사일 방어체계 구축 논의를 가속화하고 있다.
바스티유 데이의 화려한 퍼레이드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이 더 이상 '안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안보 생산자'로 전환하려는 의지를 국제사회에 선언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세계 안보 질서는 지금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안보 전략과 방위산업 정책에도 중요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앞으로 국가 경쟁력은 경제 규모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방산 공급망과 자주적인 방위 역량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