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글 / 이세훈 논설위원 | 잊혀 지지 않는 슬픈 기억과 망각속에 살아가는 인간과 대자연
자연의 변화에 따라 여름내내 그 더위속에서 간절한 노동을 제공한 덕에 이제 너른 들판에는 풍성한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풍족한 날들이 계속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시골로 낙향을 한 탓에 언제나 시간만 나면 너른 들판을 거닐 수 있는 여유 또한 생겼으니 더더욱 감사한 일상입니다.

다만,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으나, 전염에 취약한 어린이 집부터 다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각 가정을 침략하고 있습니다만,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고는 있는지, 감감 무소식입니다. 저 역시 아들 내외로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서로 만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 우연히 기사를 보다 세월호 유가족과 이태원거리참사 유가족 그리고 군에서 사망한 이들의 가족중에서 이 세상에 살아 남아 있는 가족들이 모여 간단한 추모식과 함께 차례상을 차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억측도 많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감내하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이런 슬픔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절대 잊혀 지지 아니하고, 그저 망각과 체념 속에 잠시 잊은 듯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50여년 전쯤에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셨는데, 그 때의 제 나이가 겨우 12살 내외였었지만 지금도 하나도 잊혀 지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제 아버님은 늘 책을 가까이하셨고, 높고 낮음 없이 누구 하고도 본인이 지닌 모든 것을 함께 나누셨으며, 산을 좋아 하시어 당시 헐벗은 산을 가꾸기 위한 산림녹화사업을 솔선수범하였던 책임자로 저에게는 더욱더 다정다감하셨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사고현장까지 가는 순간까지도 당연히 살아 계실 것이란 믿음이 확고하게 있었지만, 상황은 그 반대였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철부지 나이였습니다.
당시에도 3일장의 장례절차가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전도양양한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 우리 가족은 10여일이 훨씬 넘는 시간이 경과하고 서야 부친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고수습의 기간도 필요했으리라 봅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부친과 함께 생활한 시간보다도 무려 5배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그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저의 현실이며, 가족의 죽음입니다. 특히나 자연사가 아니고, 병사나 사고사인 경우에는 가슴이 더욱 더 아픕니다.
부친을 가슴과 땅에 묻은 장례식 이후 모친께서는 하시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시골 집으로 낙향하여 시골의 전답을 가꾸시면서 시묘살이 3년을 보내셨습니다. 시묘살이 기간 중에 매일 상식을 올리고, 매 15일마다 삭망제를 올리는 정성을 다한 다음 저희는 비로서 3년 탈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서울에서 15일마다 어머니께서 홀로 계신 시골에 내려가 삭망제를 지내고, 그 밥을 먹고 자랐습니다.
이제는 두분 모두가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추석이나 각종 명절에는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게 된다”는 자조 섞인 말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슴 한쪽의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꽃다운 나이에 비명횡사한 세월호나, 이태원 거리참사에서 운명을 달리한 젊은 넋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들의 슬픔은 가족들에게 아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들의 모든 부모님과 가족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립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시기에 연도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연도는 위령기도로 돌아가신 연옥영혼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을 때, 가톨릭 신자들이 하는 위령기도인 연도를 보고 어느 기자가 연도(煉禱)를 ‘연(連)이어서 하는 기도’라고 해석하고,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본뜻이 왜곡되어 조금은 아쉬웠지만, 기발하게 풀이한 그의 노력이 가상하다 생각해 봅니다. 하기야 연도는 연(連)이어서 하면 더 더욱 좋으니 연도(連禱)라고도 당연히 칭할 만합니다. 연도(煉禱)란 ‘위령의 기도’의 옛말로, 세상을 떠나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저 역시 어제는 추석 차례를 지내면서 부모님과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고, 그저께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 홀로 부모님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가끔 어렵사리 빈소에 모여 함께 연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이 연도라는 기도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한데 모아집니다. 연도는 상주들의 애통함을 함께 느끼며 기도를 하게되고 슬픔의 밑바닥을 함께 헤아리게 되기도 합니다. 연도의 음율이나 곡조 또한 아주 매력적입니다. 몇 번만 따라하면 쉽게 익숙해지고 마음 역시 편해집니다.
어찌 보면 중세의 수도원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기도 하고, 내 옷처럼 편한 한국적 가락이란 생각 역시 들기도 합니다. 연도는 제 자신을 위해서도 더없이 좋은 기도입니다. 연도의 주된 내용은 성서 시편에 나오는 주옥 같은 시어로 내 입을 통해 연옥에 계신 죽은 자들의 희망을 간구하는 내용이나 곧 다가올 나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잊어도 가족들만은 자녀를 잃은 슬픔과 형제자매를 잃은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평생을 잠깐 잠깐의 망각속에 살아가는 편린들을 간직한채 생활하게 됩니다.
그들은 정부 당국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아픔을,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이므로 함께 알아 달라는 몸부림이고 바람이었으며,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고, 단지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위한 진정한 추모를 희망하였거나, 진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한 위령의 시간을 갖고 싶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언제나 한 번도, 내 탓이라 자인하면서 진정한 아픔으로 이들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였습니다. 참,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제도 이 나라의 대통령은 원폭피해자를 위한 자리에서 일본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웃과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누구도 찬성하는 바이지만, 이웃이 저열하고, 비도덕적이고 강도라면,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관계 형성이 잘 유지될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의 일천한 역사인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침탈의 역사는 100년의 역사가 아닙니다. 광개토왕비나 삼국사기부터 이야기를 하여야 하겠지만, 소위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7년간의 강점기간과 이로부터 3백년뒤 경술국치는 침략자인 일본에 의하여 이 땅의 피지배계급의 고통이 아주 극심한 세월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은 국내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을 자국생존의 기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정립하였 뿐 아니라, 그 신념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 신념은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황당한 제국주의적 신념으로 부활하였고, 그들의 식민지 침략은 단지 100년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신념이며, 본능이 되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았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하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경성제국 대학병원에서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목인아, 목인아! 네가 정말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웅장한 목소리로 부르 짖은 바 있습니다. 여기서 목인이라 함은 무즈히또의 우리 말인데, 히로히또의 할아버지인 명치 천황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세계 2차대전 종전 시, 일본의 히로히또가 독일의 히틀러와 같이 자살을 했거나,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면 오늘날 일본은 천황제의 폐지와 함께 감히 이웃을 비웃거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도 없는 가혹행위를 지속할 수 없었으며,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 우기는 모순된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후쿠시마 핵 오염수와 같은 일본내의 문제를 인류의 공영자산인 바다에 방류하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 야만적인 일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론을 해봅니다. 이런 가식적인 일본을 진심으로 대하는 윤석렬 정부의 무지한 태도야 말로 단채와 도산은 물론 모든 독립투사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꾸짖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논의를 이제 돌려 정권을 창업하고, 수성을 지키는 일이 서로 다름은 3,000년 인간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에 충분히 언급되고 있는 사항입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 말미의 “과진론”에는 “천하를 하나로 합칠 때에는 기만과 폭력을 높게 친다”고 쓰여 있습니다. 즉, 생존과 권력창업을 위한 순간이나 반드시 상대를 물리쳐야 하는 전쟁터에서 도덕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갖은 권모술수로 상대방을 농락하고, 침공하여 물리침으로써 천하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창업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함께 천하의 인재를 두루두루 등용하여 새로운 법률과 통치이념으로 민생을 돌보야 했는데, 이를 진시황은 잘 지켰기에 천하를 통일하고 비로서 창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천하통일이후 수성의 과정에서는 능력 있는 선비와 백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간신과 도사들을 자신의 곁에 두어 자신의 영원한 영달을 추구하면서 사사로운 권력을 앞세우고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세력과 백성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형법과 형벌을 적용했으며, 무거운 세금과 군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혔기에 불과 15년만에 진나라는 사라지게 된 겁니다.
모든 실패에는 언제나 조짐이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절대 곁에 두지 않기에 모든 권위와 신뢰를 국민들로부터 잃게 됩니다. 오늘날, 검찰의 수사를 지켜보면서, 하나같이 신뢰할 수 없는 옛 사람들을 각 부의 장관으로 제청하고, 국회의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없이 무려 14명이나 그대로 각료로 임명하는 대통령의 독선을 바라보면서, 절대의석을 차지한 야당과 진솔하게 국정을 논하는 일체의 대화와 타협을 하지 않는 독단을 바라보면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건국기념일과 친일 극우중심의 이념논쟁으로 독립투사들에 대한 반 인격적 참살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짧은 시간안에 이 정권은 스스로 자신들이 지켜야할 수성을 참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국민적 민의가 돌아설 때 우리는 지난 역사속에서 반드시 썩은 것은 도려내었고, 새것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마치 영원하고 굳건할 것 같은 거대한 울타리도 민의의 변화 앞에서는 아주 무력하게 무너짐을 우리는 이제 충분히 압니다. 풍요로운 이 계절에 민의는 철 지난 이념놀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무너져가는 국가경제를 다시 살리고, 여야가 대화로 모든 것을 풀어 다시 한번 융성한 대한민국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희망한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