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우리 삶에서의 온전한 쉼과 일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겨우 100여년을 살다가 죽음에 이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고 겨우 100여년을 살다가 그 이름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공과를 남기거나, 학술적인 저서나 이론을 남긴 사람들은 다시금 그 행적이 후대에서 조명이 되니 제법 오래 이름을 남기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어야 100년이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로병사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태어나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하는 일상이 3대를 이어 지나면 유교적 관습에서도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허용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에 나오는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요크셔 지방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으로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사춘기의 반항심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느 상선에 오르게 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오직 바다가 주는 자유를 만끽합니다. 로빈슨은 브라질에 도달하여 브라질에서 농장일을 하며 살다가 얼마되지 않아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다시 올라타게 됩니다만, 이 배는 앤틸리스 제도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가 끝내 난파하게 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맨 몸으로 혼자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28년하고도 2개월 19일을 살게 됩니다. 로빈슨은 그 섬을 ‘절망의 섬”이라 불렀습니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은 1719년 런던에서 출간되었고, 출간당시 작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 소설이 먼저 발표되어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 출간되자 마자 이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 가공의 무인도 생활을 탐독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소설 속 “로빈슨 크루소”는 신화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소설 속 무인도 생활을 보고 나름 저마다의 로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의 입장에서는 결코 낭만적이거나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섬에 홀로 남아 여유롭게 아름다운 별을 보다 잠들고, 열대과일을 먹으며 사는 모습에서 여유와 쉼을 느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빈슨 자신은 바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육지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직접 기르고 지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28년동안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려 가는 것들을 기억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 매우 절박하고 중요하였습니다. 단순히 사용하던 언어를 잃고, 그 뜻을 잃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사회, 문화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어 있는 매시간은 스스로 노동을 해야 했고, 비어 있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채우는 것이 하루하루의 가장 큰 일과였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비어 있음은 야생생활과 동의어라 생각합니다. “로빈슨”은 잠시라도 쉬어 있는 시간이 있다면 유일한 대화 상대인 성경을 읽었습니다. 신은 오직 한 분이며, 사유재산은 노동과 땀의 결과물이라 성스럽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으며,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게으름과 말초적인 쾌락에 스스로 몸을 맡기지 않는다는 신조 하에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로빈슨의 이야기를 보며 완전히 다른 상상을 하게 됩니다. 무인도를 보면서 하느님이 태초에 우리에게 내어 주신 에덴동산을 생각하고, 그곳에서 누릴 자유스러움을 꿈꾸게 됩니다. 구속이나 지켜야 할 의무도 없이 하늘과 바다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를 벗삼아 사는 지극히 여유롭고 온전한 삶과 쉼을 상상합니다.
이제 로빈슨이 생활하던 야생의 쉼 공간은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줄지어 다니는 관광과 TV에서나 보는 무인도 생활체험으로 인해 황폐화되어 갔고, 관광이 자연을 빼앗아간 지금, 낙원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남들이 가는 똑 같은 관광지나 장소에 가야하고, 모두가 비슷한 여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보존한 곳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미 자연풍경은 모두 획일화되었고, 오염되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로빈슨이 나타난다면 환경운동가나 미니멀리스트가 되거나 세상 종말을 예언하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로빈슨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무인도에서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욕망, 일에 시달리지 않고 혼자서 여유롭게 사는 삶과 쉼을 꿈 꿉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가족을 부양하는 일,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일과 기술개발을 통하여 더 나은 삶을 이루려는 삶에서 자유롭거나 해방되는 꿈을 꿉니다. 우리는 이것을 쉼이라 지칭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맛집에 가고, 쇼핑에 열중하면서 매번 흥분과 열정을 느낍니다. 산속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들이나 가톨릭 수도원에서의 고독함과 싸워가며 절대자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와 스스로의 단순한 삶과 노동에 의지하며 열심한 수사들과는 거리가 먼 쉼을 지향합니다.
인간 100세, 우리의 유한한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아름다움만을 쫓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눈앞에 항시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예상치 못한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속에 풍성한 감각능력을 가꾸어야 하며, 이 세상에 끝없이 존재하는 말초적인 자극과 흥분, 소비와 쾌감, 부유와 가난으로 스스로의 현재의 삶을 걱정하고, 채우려는 노력으로 삶의 여백을 다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시간 또한 끝없는 분주함으로 채우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 자체를 소중히 여겨 즐기고, 고독이 찾아와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삶이 진정한 쉼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고독의 즐거움과 보다 자유롭고 완전한 쉼을 즐기려면 계속 무엇인가를 하면서 휴식시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분명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바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는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가져야 할 자세는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애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현실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디서든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이 진정한 나르시시즘입니다. 비어 있는 것이 두려운지요? 꾸미지 않은 우리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불안한지요? 로빈슨의 완벽한 생활모습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의 위대함과 여유로움을 위엄을 실험해 보는 모습일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쉼과 일이 구분되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들의 삶에서 진정한 쉼을 찾아 즐기기는 어렵지만 바로 이 순간부터 도전해 봐야 할 화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논설위원 이세훈 /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