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아기들의 비정한 주검 앞에서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봐야 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곱추 이야기에는 거리에서 지갑을 날치기하다가 잡혀 현장에서 손이 잘리는 즉결심과 즉결형이 집행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결형을 당한 이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손을 주워 허리춤에 끼고 돌아가는 장면이 기억나기도 합니다. 아직도 회교국가에서는 회교율법에 따라 신체형을 가한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이는 과거 유목민으로서 가축과 함께 또는 자신들의 상업을 위하여 이동을 하는 유랑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한 범죄에 대하여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나온 즉결 신체형 규범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농사를 짓고 정주를 목적으로 삶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에게도 이러한 신체형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천성이 모질지 못하였던지 상대적으로 그리 잔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단근형이라 하여 세번 이상 절도를 계속하다 잡히면 오른손의 힘줄을 끊어 버렸는데 이 마저도 조선 중종이후에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폐지되었다 합니다. 오히려 절도범에게는 오늘날 명예형에 해당하는 형으로 팔뚝에 “절도”라는 한자를 새겨 드러나게 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 성폭행범 등 성범죄자에게 전자 팔찌를 채워 감시하는 방법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남녀의 신체지수가 이미 서구화되어 남녀구분없이 중학생만 되면 성인과 같은 체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대학 입학전에 성경험을 한 비율이 상당하다는 통계치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 경험자가 성 경험을 반복하는 사례가 더 많을 것이므로 실질 경험자 비율은 상대적으로 더 작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최근, 영아를 살해하여 유기하거나, 출산 후 어린 부모의 무관심 또는 아동폭력과 아동학대로 사망하는 아기들의 기사가 매일 뉴스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이들 부모는 성인이 되었고, 자기 자신의 성결정권에 의하여 자녀를 낳았으니 뭐라고 할말은 달리 없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근본인 부부와 가정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최근 몇 년 동안 미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유명인사의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사회 문제화된 사건을 충분히 목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 사각지대에서 비정한 어린 부모들의 자녀학대 및 살해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접하고 있고, 국회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의결하여 의료기관의 장이 아동의 출생 후 14일이내에 출생자의 모의 성명 및 주민등록번호, 출생자의 성별, 수, 출생년월일시 등을 시.읍.면의 장에게 통보하라는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의 모순은 출산을 숨기고자 하는 부모의 사정이 존재할 수 있을 경우와 이들이 병원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행동에서 발생하는 사안에 대하여는 거를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들 부모들의 경우, 병원이용을 회피하게 됨으로서 산모의 건강권은 물론 태아의 건강권까지 크게 위협하는 사례로 악용될 수도 있음이니, 혹시라도 법 집행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사례들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강구되어야 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아직 미숙한 부모와 이들이 출산한 아이들은 우리 사회와 정부가 보살펴야 합니다. 설령 자기 자신의 성결정권을 갖고 행한 행위라도 이들 스스로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함께 생활하기 어려운 환경이 많을 터이므로 사회가 이들을 대신하여 성장시켜주는 제도적 기틀마련이 절실해 보입니다. 지금도 천주교나 불교,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지만 좀 더 이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들처럼 미숙한 부모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한부모 가정도 존재하고, 아이들만 있는 결손가정도 존재합니다.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출산을 장려하는 제도의 시행도 중요하겠지만 이미 이 땅에 태어난 고귀한 생명들에 대하여도 무한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며,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원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지자체도, 정부도 출산 시 지급하는 출산장려금 제도를 폭넓게 활용하여 이들이 원하는 비밀유지와 좀더 촘촘한 출산 및 아동들의 성장을 위한 사회복지를 더욱 확대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도 전국에서 몇 명의 엄마들이 자녀살해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런 비극적 사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요?
“명심보감 치가 편”에 의하면 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時時防火發, 夜夜備賊來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 집안이 화목하면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며, 때때로 불이 나는 것을 방비하고 밤마다 도둑이 드는 것을 막으면 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은 가정입니다. 즉, 家和萬事成의 화(和)는 벼(禾)와 입(口)을 합친 말입니다. 벼는 밥이 되는 곡식이고, 입은 음식을 먹는 몸의 일부이니, 결국 '밥을 먹는다'는 뜻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가화(家和)는 집안식구 모두가 둘러 앉아 밥을 먹는 것이 되고, 가화만사성은 결국 '가족 모두가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면, 안 풀릴 일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옛 선조들이 사람들 삶 속의 절실하고 진실한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떻게 풀리는지, 너무도 잘 통찰한 참 교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大學) 8조목에 의하면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자고로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그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하고,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그 집안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자신의 수양을 해야 하고,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자기자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하고,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그 마음을 바로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해야 하고,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에 힘써야 하고, 致知在格物, 지식에 힘쓰고자 하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함에 있다고 합니다. 格物而后 知至, 만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한 이후에 지식이 지극히 되고, 知至而后 意誠, 지식이 지극히 된 이후에 뜻이 성실히 되고, 意誠而后 心正, 뜻이 성실히 된 이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며, 心正而后 身修, 마음이 바르게 된 이후에 자신의 몸이 수양이 된다. 身修而后 家齊, 자신이 수양이 된 이후에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家齊而后 國治, 백가(百家)를 정돈한 이후에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國治而后 平天下, 나라가 잘 다스려진 이후에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줄여서 “身修家齊治國平天下”라 합니다.
작금 우리 사회는 대통령의 가족이든, 정부 고위직의 공무원이든, 공무원의 가족이든, 국회의원이든, 그 가족이든, 사회저명한 인사들의 본인과 가족들을 포함하여 사회전반에서 쉽게 가족들의 일탈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자산 취득과정에서의 이해 다툼과 송사, 주식 통정거래를 통한 이익추구, 마약, 폭력, 반대세력에 대한 상호 음해 등 사회전반에 걸친 악행들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부모님과 우리사회의 보살핌덕에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한 사람으로 감히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국민은 피곤하고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겸손하거나 일체 정제되지 않은 말들로 가득 차 있고, 거리의 건달이나 양아치들이 사용하는 말 만도 못한 표현들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선동하는 표현들이 즐비합니다. 가히 폭력적이며 선동적입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의 핵 오염 처리수의 본질적 해결방안은 일본정부가 일본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스스로 처리하라는 지구촌의 준엄한 명령만이 유일한 해결 방법입니다. 인류공동의 유산인 바다로 핵 오염 처리수를 방류한 이후, 우리 어민이나 국민들의 피해를 지금 논하고자 함이 절대 아닙니다. 여당의원들이 횟집을 방문하며 가식적인 행위를 할 때도 아닙니다. 너무도 치졸한 방법입니다. 방류하지 말라는 원론적인 외침이 유일한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본정부가 자신들의 자금을 투입하여 고체화의 방법이든, 또 다른 어떤 과학적, 기술적 방법이든, 스스로 자국내의 영토안에서 처리하라는 준엄한 경고가 우리들이 요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왜 여야가 갈리고, 괴담이 소환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언론도 이제는 제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바른 지혜와 바른 경고로서 올바른 의견을 국민에게 전달하여야 합니다.
우리사회의 모든 모순은 바로 가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올바른 성장이란 건강한 몸과 함께 건강한 정신이 깃든 성장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6.25전쟁이후 짧은 시간안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인문학적 사고방식이 배제된 채 기술중심의 세상에서 오로지 좋은 학벌과 성공을 주위로부터 강요를 받으면서 양적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베이비 붐 시대의 인구증가는 산업동력을 확보하는데 쓰였으며, 높은 교육열은 기술 자립도를 강화하는데 쓰였습니다. 또한, 급격한 성장은 부모자식 간의 간극을 더욱 넓혀 놓았고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대화는 단절되었고, 부모는 일터에서, 아이들은 또래의 친구와 함께 따로따로 지내게 되었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미 노인화가 진행된 부모와는 이제 사사건건 대립하고, 더 이상 한 식구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부모부양의 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된 지 오래고, 신 고려장의 장소로 종종 요양원이 선택되기도 합니다. 요양원은 한번 들어가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돌아온다고 하여도 우리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돌볼 수 없는 환경이 점점 현실이 되어갑니다. 물론 자녀의 돌봄 없이 홀로 지내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노인의 문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젊은이들도 고시원에서, 쪽방에서, 원룸에서 부모를 떠난 홀로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적 현상이겠지만 각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습관화되고 있고, 지극히 개인 주의적인 생활이 더욱 중심이 되어 갑니다. 가족은 명절이나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의 안위와 우리 아이들의 성공과 부유한 생활만을 생각하는 작은 생각들은 우리 사회를 좀 먹습니다. 우리 가슴에 있는 이기적인 생각들을 이제는 좀더 함께 살아가고, 함께 나눈다는 이타적 마음으로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 또는 연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아련한 추억속의 지고지순 한 사랑과 헌신적인 사랑은 이제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경제적으로나 온 마음으로 돌보며, 함께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를 이행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면 이별을 서로 감내해야 합니다. 이별이 이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 다툼을 하거나 상대를 비하하고, 심지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안에 현존하는 사랑과 헌신은 우리와 함께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고,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기에 어쩌면 더욱 존귀한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인들 조차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의 결혼도 높은 이혼율로 나타나게 되리라 봅니다. 결혼전에도, 결혼후에도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건만 이제는 서로 서로를 외면합니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살아보니 서로 달라진 걸까요?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아서 그리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일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명심보감과 대학은 나를 먼저 살피고, 가정을 살피고, 그리고 국가를 살펴야 한다는 말로 이 시대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모든 사회문제에 대하여 오늘 우리들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논설위원 이세훈 /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