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바른 생각,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동....

국회의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유독 눈에 띄는 마찰들이 최근 계속 발생하고 있다.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본지 논설위원 | 국회의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유독 눈에 띄는 마찰들이 최근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민의의 장소에서 서로 갑론을박 하며 자신의 당위성이나,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는 있지만,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물론,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의 자세와 말이 어쩌면 그리도 고압적이고, 황당한지 모를 일입니다.

 

 

이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이 된다면 우리 일반 국민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국회에서 이러한 고압적인 자세의 이면에는 이에 대비되는 우리 국회의원들의 평상시 말과 행동도 함께 돌아봐야 할 문제가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게 되지만, 미래세대를 이끌 우리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보고 짖는다”는 우리 속담과 함께 한편의 코미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민통합을 강조하면서도 철저하게 계산된 진영논리와 이념논리에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지쳐 가고, 찌들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기료 등 생필품 가격들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국제무역 수입감소에 의한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조금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누적 무역수지 적자폭은 계속 심화되고 있으며, 전 세계 기업간의 무한경쟁은 더욱 치열하여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서민들의 피부로 체감하게 되는 체감경기는 지금 가공할 만합니다.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한미일 동맹을 외치며, 북중러의 단합을 가져오게 하는 “자충수”를 두고 있으며, 정부의 친미일중심의 굴종주의는 한동안 시간이 지나도 바뀌거나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균형외교는 이미 흘러간 옛 노래일 뿐입니다.

 

일본에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후쿠시마 핵오염수의 방류에 대하여 인접국으로서, 최대 피해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방류를 일방적으로 지지 또는 찬성하는지도 국민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중국이나 홍콩처럼 자국민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산 수산물 금수조치를 즉각 취하지 않는 이유 역시, 국민들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최근 부산지역에서는 원산지가 일본인 수산물의 원산지를 속여 가며 전국에 유통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대체 국민은 어디에서, 누구의 말을 믿고, 안전한 섭생을 하여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윤석열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일본정부와 IAEA등이 발표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믿으라 주장하면서도 안전대책은 허술하고, 미비하기만 한데,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과 야당, 시민사회단체들을 괴담 유포자로 지적하는 대담함을 표출하는지 역시 모를 일입니다. 이 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요?

 

최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의 바다에서 일본 정부가 이미 기준치로 제시한 검출 하한치를 초과한 삼중수소 농도가 계속 관측되고 있습니다. 오염수가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방류되는 한, 후쿠시마 앞 바다는 여러 방사능 오염물질로 쌓여 가게 될 것이고, 이곳의 생태계 변화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방류로 인해 인류의 공동자산인 바다의 변화는 크든 작든 다른 환경적 폐해와 함께 점점 더 그 내상이 깊어 가리라 예측됩니다. 단, 며칠의 방류로 끝날 문제가 아니기에 앞으로 30년 동안, 그리고 또다시 그 이후 30년과 어쩌면 향후 100년의 일을 논의하는 자리이므로 더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고 즉각적으로 해양투기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핵 오염수 해양투척을 계기로 다른 나라들도 바다에 방사능 폐기오염물 등 각종 오염물을 투하해도 된다는 명분은 이미 충분히 축적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바다는 더욱 각종 오염 폐기물로 고착화되어 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을 정부나 여당이 나서서 겁박 할 문제는 아닙니다.

 

만약, 오늘 찬성의 결과가100년 뒤에 치명적인 문제로 확인되고 대두된다면 그 책임을 물어 그때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과학자들과 방류 정책을 지지하고, 결정하고, 그 정책을 집행한 책임 있는 사람들을 조선시대처럼 부관참시 하여야 할까요? 이때는 형벌의 문제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앞에 우리의 미래세대는 어떻게 안전한 삶을 유지해야 할까요?

 

지난, 9월 8일 국회의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더불어 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질의과정에서 이들은 서로 언어적으로 대립한바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장관으로서 적절한 언어선택이나, 바른 말을 사용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나, 질문자의 과거 행적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발언은 그 치졸함을 떠나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반드시 고쳐야 할 자세로서, 자신의 영역에 대한 답변만 하면 되지, 너도 그랬는데 내가 왜? 라는 반복되는 언어적 습관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작은 그릇임을 알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날, 더불어 민주당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가장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는 바로 “내로남불”의 자세임을 우리 모두는 똑똑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때, 국민들은 언제나 지지를 철회하고 돌아섰습니다. 누구든 정확하고 바른 말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언어선택과 언어통제를 통하여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가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나 국민을 대표하는 공인은 그 말이 가져오는 품위와 품격을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초기 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는 불교의 중요한 교리로 '사성제'와 '팔정도'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가리킵니다. 이 세계는 고통(苦)이며, 고통의 원인(集)은 욕망이고, 고통을 소멸(滅)하기 위한 길(道)을 통해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열반에 이르는 길인 도제(道諦)에는 여덟 가지의 수행 덕목이 있는데, 이것을 팔정도라고 합니다. 팔정도를 굳이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업과 악업이 모두 이것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팔정도(八正道)에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습니다. 정견(正見)은 바르게 보기, 즉 바른 견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우침 없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생각이라는 뜻으로,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어(正語)는 바른 말로 정사유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실천입니다.

 

즉 거짓말, 속이는 말, 이간질하는 말,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참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동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부정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사유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건전하게 생활하고, 바른 생활 습관을 지니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으로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념(正念)은 바른 의식으로, 항상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정(正定)은 바른 명상으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을 뜻합니다. 팔정도를 지키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는 국무위원이나 국회의원들은 이를 가슴속에 담고, 지키려는 노력을 반드시 행동으로 해야 하는 공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부처께서 하나의 덕목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공한 것이고, 환(幻)이기 때문에 한순간의 생각이 무량겁의 생각이 된다고 합니다. [一念卽是無量劫] 즉, 돈수와 점수는 결국 같은 것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돈오돈수가 옳으니 돈오점수가 옳으니 하는 불교의 오랜 논쟁은 ‘일념즉시무량겁’을 모르거나 고려치 않은 부질없는 말장난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하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모든 논쟁 역시 허황된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 밝혀질 일이나, 예상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일찍 막아 보자는 입장이 바로 우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즉, 한 순간에 깨닫는 것과 무량겁에 깨닫는 것은 결국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 의해 “초발심이 곧 정각이다 [初發心時便正覺]”라는 가르침을 떠올리면 돈오돈수가 맞고, 돈오돈수는 “초발심이 곧 정각이다.”라는 〈화엄경〉 가르침의 선적 표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삼계는 불교의 우주관 또는 공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의미합니다. 삼세는 불교의 시간관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합니다. 부처가 성도 후, 처음 갖춘 신통력은 삼명(三明) 육통(六通) 중 숙명통(宿命通)으로 과거를 보는 능력이었습니다.

 

부처는 시간과 공간을 다 통찰하는 능력을 갖추신 뒤에 명색(名色)의 악인(惡因)을 해결하기 위하여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한다는 해결방안을 제시하신 겁니다 명색(名色)은 훈민정음으로 말하면, ‘이름’과 ‘빛’입니다. 이는 “정신과 물질”로도 풀이했지만 “심신”(心身)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을 뜻합니다.

 

마음과 몸이 나쁜 인연으로 괴로울 때, 우리는 팔정도를 부단이 행하여야 합니다.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팔정(八正) 이란 실로 단순 명료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正語), 행동(正業), 생활(正命), 사유(正思惟), 방편(正精進), 의식(正念), 선정(正定), 봄(正見)이 올바르게 서게 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가 우리에게는 왜 이리 어려울까요?

 

보통 팔정도의 처음은 “정견”인데 조선 세종조에 간행된 불경 언해서인 “월인석보”에서는 우리가 흔히 살펴본 순서와 뒤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정어” 즉, 바른 말이 첫 번째입니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월인석보 편찬자의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부처는 십팔불공법을 홀로 갖추신 분입니다. 십팔불공법이란 18가지의 가르침입니다. 그 하나는 몸의 행적에 허물이 없으신 것입니다(身無失). 둘은 입의 말에 허물이 없는 것이고(口無失), 셋은 마음먹는 것이 허물없는 것입니다(意無失). 넷은 잡된 마음이 없는 것이며(無異想), 다섯은 섭섭하고 어련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無不定心).

여섯은 세간의 법(法)을 다 버리고도 아는 것이며(無不知已捨), 일곱은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欲無減). 여덟은 정진함이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며 (精進無減), 아홉은 깨끗한 념(念)이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念無減). 열은 지혜가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며(慧無減), 열하나는 벗어남이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解脫無減).

 

열둘은 알며 보는 것이 늘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며(知見無減), 열셋은 몸에 하는 행적이 지혜를 좇아 하는 것이며(一切身業隨智慧行), 열넷은 이르시는 말씀이 지혜를 좇아 하는 것입니다 (一切口業隨智慧行). 열다섯은 뜻에 마음먹는 일이 지혜를 좇아 하는 것이며(一切意業隨智慧行), 열여섯은 지나간 과거(劫)의 일을 아는 것입니다 (智慧知見過去世無礙無障). 열일곱은 아직 오지 않은 시절(劫)의 일을 아는 것이며 (智慧知見未來世無礙無障), 열여덟은 현재 이 겁의 일을 아는 것입니다(智慧知見現在世無礙無障).

 

이를 통해 부처는 생사 괴로움의 근원인 삼독(三毒)을 제거하고, 샛별인 불성이 뜰 때에 큰 깨달음(大悟)을 얻고 정각을 이루십니다. 삼독(三毒)은 ‘독약처럼 사람들을 해롭게 하고 번뇌하게 하여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의 마음’으로 탐욕(貪欲), 진에(瞋恚, 성냄, 노여움, 분노, 증오), 우치(愚癡, 어리석음)인데 줄여서 우리는 이를 탐·진·치(貪·瞋·癡) 라고 칭합니다. 보통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 칭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가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말로 ‘화병’이라는 단어가 세계적으로 의학적 개념으로서 알려진 것도 작금에 음미해 볼만한 일입니다.

 

백주 대낮에 백화점에 차를 몰고 돌진하여 여러 사람을 살상하게 하는 행위나,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에게 자기 자식을 핍박하였다고, 학생을 대리하여 항의하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지속적인 협박을 통해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길을 선생님들에게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학부모나 자신의 가족만 중요하다는 가장 작은 가치관이 형성됨에 따라, 타인과 나를 철저히 격리하고 구분하는 습성으로 인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에는 나 이외의 제 3자에게 어느덧 참을 수 없는 화가 내재되어 있어 스스로 통제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서로서로를 향해 거친 울분을 쏟아내면서 전투적 양태를 띄고, 더욱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이제는 이러한 "화:가 우리의 인성을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 나의 욕구가 또는 나의 희망이 어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화가 나는 것이고, 또 홧김에 어리석은 결정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 곧 분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보수라는 집단과 소위 진보라는 집단이 서로 불멸의 화병에 결려 있는 아주 위중한 상태에 있습니다. 바로 보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는 옮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상대진영에 대한 무한한 감정적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화”이며, "분노"입니다.

 

불교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은 신구의(身口意) 삼 업의 허물이 없고, 지혜를 좇아 행하는 것이 가르침의 골자입니다. ‘의(意)는 마음먹는 것, 이상(異想)은 잡된 마음’이라는 멋진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섭섭하고 어련한 마음’은 ‘부정심(不定心)’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이는 일정하지 않은 섭섭하고 소홀한 마음 정도로 풀이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연하다”는 의미의 ‘어련하다’가 아닌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늘어지다’는 “해이해 지다”로 볼 수 있는데 한자어로는 ‘감(減)’이라 줄어들다는 뜻이라 다소 혼동할 우려가 있습니다.

 

제 삶의 경우, 점점 단순함을 찾아 서울을 떠나 시골에 살고 있고, 바쁘지 않게 지내려 노력 중입니다. 시골에서 혼자 생활할 때는 며칠씩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혼자 지내니 말보다는 책을 읽거나 잠을 청할 뿐,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시골집 처마 밑의 봄은 따뜻했고, 여름은 뜨거웠으며, 겨울은 추웠습니다.

 

머무는 내내 여전히 입을 닫았었고 말은 없었습니다. 간혹,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란과 작약이 피는 기척에 가슴이 설레곤 했습니다. 헤어진 이는 멀리 있으니 안부를 물을 길도 없었습니다. 가끔씩 마루까지 비가 들이쳤고, 고요를 드려다 보고는 이내 돌아갔습니다. 물은 흐르고, 복사꽃은 흐트러지게 피었다가 지었고, 달은 찼다가 기울기를 반복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23장에 '희언자연(希言自然)'이란 경구가 나옵니다.

 

도덕경 “왕필본”에 의하면, 말이 적은 것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나운 바람은 아침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하겠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또한, 도덕경 백서본에 의하면, 말을 적게 하고, 본래 그대로 두어라. 사나운 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도 종일 내리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오래 할 수 있겠는가?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希言自然.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而不能久, 又況於人乎.]

 

말을 적게 함이 자연에 더 가깝다는 말입니다. 자연은 늘 말이 없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도 그러함으로 충만합니다. 말이 적음은 자연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늘 자의성과 즉흥성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언제나 실수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의 성질이고,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무위이고, 말은 꾸밈이면서 인위입니다. 말이 많으면 난망 합니다. 말에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신용을 잃고, 세상의 평판이 나빠집니다. 그러니, 말은 간명하되 적게 하고, 무위의 자연을 따르는 길이 어떨까 싶습니다. 혼란한 세상입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동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