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강경희 기자 | 이 작품은 감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마주함을 요구한다. 무속인 아랑이 그려낸 이 푸른 용은 장식적 상징도, 길상의 도상도 아니다. 이는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존재, 다시 말해 주술적 호출의 결과물이다.
작품 속 용은 고요하지 않다. 구름을 가르며 출현한 푸른 비늘의 몸체는 상승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 움직임에는 긴장과 각성이 동시에 흐른다. 전통 회화에서 용은 왕권과 복을 상징했으나, 아랑 작가의 용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다. 이 용은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질서를 흔들고 기운을 전환하는 존재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용의 시선이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붉은 구슬을 향해 몸을 틀고 있다. 이 구슬은 흔히 여의주로 해석되지만, 아랑의 세계관에서는 단순한 소망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집중된 기운의 핵, 혹은 인간과 세계를 잇는 매개체에 가깝다. 구슬 주위로 흩어지는 붉은 기운은 축복이 아니라 경고처럼 읽힌다. 다루지 못한 힘은 곧 화火가 된다는 무속적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름 또한 중요하다. 이 작품에서 구름은 배경이 아니라 장막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를 가르는 경계이자, 신령이 드나드는 통로다. 용은 그 구름을 헤치고 나오며, 이는 곧 차원을 넘는 출현을 의미한다. 무속에서 신령의 형상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 순간을 포착한 기록에 가깝다.
색채 선택 역시 주술적이다. 푸른색은 동방·청룡·생명의 기운을 상징하며, 동시에 깊은 물과 하늘의 속성을 함께 지닌다. 여기에 더해진 붉은 색채는 화火의 기운으로, 조화되지 않으면 재앙이 되지만, 균형을 이루면 강력한 전환의 에너지가 된다. 아랑은 이 두 기운을 화면 안에서 충돌시키며, 지금 이 시대의 불안정한 에너지 구조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아랑 작가이자 무속인의 작업이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그림은 ‘잘 그린 용 그림’이 아니다. 기도와 상상, 감응과 기록이 겹쳐진 주술적 회화이며, 개인의 안녕을 넘어 공간과 시대의 기운을 다루려는 시도다. 그래서 이 용은 온화하지 않고, 완성된 미소를 짓지도 않는다. 아직 다루어져야 할 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대의 기운을 그대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드레곤은 묻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힘을,
축복으로 다룰 것인가,
재앙으로 방치할 것인가.
아랑 작가의 용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구름을 가르고 나타나,
선택의 순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릴 뿐이다.
작가노트 | 아랑
‘블루드레곤’은 그리기 위해 만든 그림이 아니다.
부름이 있었고, 그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형상을 기록한 것이다.
푸른 용은 길상이나 장식의 상징이 아니다.
이 시대에 쌓인 기운, 풀리지 않은 마음,
지나치게 응축된 욕망이 한순간 형상을 얻어 드러난 모습이다.
나는 그것을 꾸미지 않고,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
구름은 숨김의 장막이며 통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맞닿는 경계에서 용은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산보다 감응을 먼저 따랐다.
붉은 구슬은 소원의 대상이 아니다.
집중된 기운의 핵이며,
다루는 자의 마음에 따라 약이 될 수도,
화가 될 수도 있는 힘이다.
그래서 이 용은 구슬을 움켜쥐지 않는다.
욕망을 소유하는 대신, 바라보는 데서 멈춘다.
이 작업은 완성의 선언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의 기운을 한 번 짚어보는 의식이며,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조용한 경고다.
나는 화가이기 이전에 무속인이다.
이 그림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나에게 맡긴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