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석가 탄신일을 전후하여 서울근교의 사찰에서 오래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신록이 우거지고, 바람이 그 어느때보다 좋은 계절이라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를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어 보자는 생각에서 사찰에서의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사찰에서 돌아와 부처의 생각과 그가 남긴 행적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한 친구가 사찰 경내에서 중고등학교가 불교재단의 학교라 반야심경을 다 외워야만 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반야심경을 저 역시 되뇌어 보게 되었습니다. 2024년의 석가탄신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우중에도 불교신도들은 사찰을 찾아 참배하고 기도하는 장면이 뉴스마다 반복된 하루였습니다.

반야심경은 불교 경전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으로 대승불교 반야사상의 핵심을 담은 경전으로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기 좋은 경전입니다. 원래는 6백여권이나 되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을 한문으로 260자 내외로 짧게 요약한 것으로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반야(般若)”는 프라즈냐의 음사어로 “지혜”라는 뜻이며,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파라미타의 음성어로 “완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심(心)” 은 흐리다야의 음성어로 심장, 정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經)” 은 수트라, 성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부처의 생각을 이 반야심경을 통하여 느낄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서, 대중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경전이므로 그 의미를 다시한번 살펴보기 위해 경전의 경구를 적어봅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 皆空度 一切苦厄
관재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 개공도 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 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 되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 생각, 행동, 의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형태는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고 감각, 생각, 행동, 의식도 없으며,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른 방법도 없으며, 지혜도 깨달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뀌고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말하니 이러하니라.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모두 함께 피안으로 가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모두 함께 피안으로 가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모든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설산에서 6년의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이 마음을 깨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몸뚱이와 몸뚱이가 일으키는 모든 고통이 참으로 공(空)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우리는 몸뚱이라는 실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의 뜻은 이 몸뚱이와 고통이 없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몸뚱이와 고통이 바로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이므로 공한 것이다라고하신 것입니다. 지금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생각 마음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있다고 하는 이 몸뚱이의 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다 하여 지극히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며 좋아하는 것은 번뇌 망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고 싫어하는 허망한 생각이 버릇과 습관이 되어 쌓인 것이 바로 이 몸뚱이기 때문에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그 다운 역할과 작용을 하는 생각과 마음의 부처인 것입니다. 그래서 작용과 마음과 부처를 떠나 몸뚱이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의 뜻이고, 마음입니다.
모든 법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티끌을 포함한 이 몸뚱이와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가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곧 공하고 분별의 대립이 없으므로 고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세계는 우주세계라는 이름이 바로 생각과 마음이고,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와 우주를 나타내는 뜻과, 우주에 대한 느낌이 곧 생각 마음 부처이며, 우주세계의 구성원들의 그 나름의 역할과 모든 작용이 바로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과 하나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고, 끝없이 멀리 있는 우주세계 끝자락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로서 티끌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과 하나 보듯이 우주세계 끝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부처의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이므로 영원히 죽지도 않는 무궁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상으로 이루어진 재산과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몸뚱이 전부를 남에게 주어도 조금도 아깝거나 서운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처의 생각에 맞는 부처의 행적은 어떤 것일까?
인도 히말라야의 산간도시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신 지도자 달라이 라마 곁에 머물며, 20년 동안 수행해온 청전스님(57)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가톨릭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전남 순천 송광사로 출가해 10년 넘게 선방에서 간화선을 수행하다가 티베트 불교에 귀의한 분입니다. “탄트라(밀교)라는 게 으슥한 곳에서 남녀가 할 짓 다하며, 수행도 하는 게 아니라, 의식이 실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깨어있는 것이 바로 탄트라인데 “탄트라가 티베트 불교의 전유물은 아니며, 고려대장경에도 모두 나와 있는 것” 이라며 “한국불교에서도 서산, 사명, 진묵대사 때까지도 이어지다 명맥이 끊겼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경지는 계행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공부가 되면 계행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알지만, 공부가 되면 될수록 계행이 더 철저해지고, 자비심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라 설파하면서 “계행과 자비의 실천으로 얻어지는 공덕이 없이는 선정에 절대 들 수 없다” 고 설명합니다.
“한국불교의 선지식들은 법상에서 늘 생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처럼 대중에게 말하지만, 그토록 믿었던 분들이 열반할 때는 전혀 의식을 챙기지 못한 분들이 있으며, 큰스님이라는 분들도 두 세달씩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너무도 허탈해 선지식을 찾아 세계를 떠돌다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되었다 합니다. ” 그러면서 그는 산중 흙방에서 수행하던 티베트 스님을 지켜주던 호랑이의 발자국이 눈밭에 나 있었던 것과 티베트 수행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좌탈입망’(앉은 채로 열반에 듦)한 일 등 자신이 직접 본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한국불교가 스님들이 큰소리를 치는 것처럼 실제 수행력을 갖추지 못한 이유로 “부처의 깨달은 후의 모습만 보고,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까지 전생부터 해온 수많은 고행과 자비 선행 희생을 간과해 버린 때문” 이라고 지적한바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10년 수행하면 20년을 봉사할 수 있고, 20년 수행하면 40년을 봉사할 수 있다’는 말을 하셨는데 수행을 하면 할수록 ‘군림’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고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고 전하면서 “한국에선 큰스님 소리를 들으며 대중에게 군림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승가의 풍토에 일침을 가하면서, “1700년이나 된 한국불교 역사 속에서 왜 테레사 수녀처럼 자비의 실천자가 나오지 않느냐” 며 통탄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의 말씀에 다른 행적은 자비심의 실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점점 거대해 져 가고, 점점 더 화려해 지는 사찰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 사찰이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부처의 본래의 생각을 깊이 살피면서 부처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자비심을 실천하는지 의문입니다.
우리 불교가 모든 가르침에 우선하여 부처께서 가르친 자비심을 모든 가르침의 으뜸으로 실천하기를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