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이 단순한 해상 통로를 넘어 ‘금융 전쟁터’로 급격히 성격을 바꾸고 있다. 이란이 해협 통행과 위안화 결제를 연계하는 전략을 구체화하면서, 1970년대 이후 국제 질서를 지배해온 ‘페트로달러 체제’가 구조적 도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대부분 강력한 반작용을 불러왔다.
- 200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석유 결제를 유로화로 전환하려 했으나,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정권이 붕괴됐다.
- 2009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금 기반 ‘골드 디나르’를 추진했지만, 2011년 NATO 개입 속에 정권이 무너졌다.
- 2022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루블화 결제를 요구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SWIFT 배제 및 자산 동결이라는 전례 없는 금융 제재가 가해졌다.
현재 이란과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선택은 이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다만 이번에는 ‘해협 통제’라는 물리적 카드가 결합됐다는 점에서 이전 사례보다 파급력이 훨씬 클 수 있다는 평가다.
현재 이란은 현재 파키스탄·인도 등 복수 국가와 위안화 기반 결제를 조건으로 한 해협 통과 안전 보장 협상을 진행 중이다. 특히 3월 중순, 일부 유조선이 중국의 국제 결제망인 CIPS를 통해 대금을 정산하고 이란 영해를 통과한 사례가 포착되면서, 해당 구상이 실제 작동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미국 주도의 금융 제재 시스템인 SWIFT를 회피하려는 전략이다. 해상 통제권이라는 물리적 수단과 대체 결제망이라는 금융 인프라를 결합한, 이른바 ‘복합 제재 회피 모델’이 실전 테스트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번 사태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단순한 위안화 지폐 거래를 넘어선 기술적 진화다. 중국이 태국, UAE 등과 추진 중인 ‘mBridge(다자간 CBDC 결제망)’ 프로젝트가 이란의 새로운 탈출구로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위안화(e-CNY)를 통한 즉시 결제가 시스템화될 경우,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실시간 모니터링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는 ‘금융의 무기화’에 맞서 ‘기술의 은폐화’로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화 전쟁인 것이다.
이란의 이번 조치는 국제법적 정당성 논란도 증폭시키고 있다. 유엔 해양법 협약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항행에 이용되는 해협’에 해당하며, 모든 선박에 대해 통과통항권(Right of Transit Passage)이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특정 통화 결제를 조건으로 통행을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 서방의 시각이다. 하지만 이란은 이를 ‘국가 안보를 위한 정당한 주권 행사’로 강변하고 있어, 향후 국제사법재판소(ICJ) 등에서의 법적 공방과 미 해군의 군사적 대응 명분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또 다른 기둥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는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를 핵심 변수이다. 최근 브릭스(BRICS+)에 합류하며 중국과 밀착 중인 사우디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이례적인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사우디마저 석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를 공식 용인할 경우, 페트로달러 체제는 ‘균열’을 넘어 ‘붕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는 한국에게 이란의 요구는 쉽게 거부하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안고 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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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안보: 이란의 요구를 거부할 경우 원유 수급 차질 및 유가 폭등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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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위안화 결제에 동참할 경우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될 위험 상존.
정부는 지난 20일 G7 규탄 성명에 합류하며 일단 '가치 동맹'의 손을 들어줬으나, 실제 해상 통행 차단이 현실화될 경우 플랜B가 부재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주요국 언론의 평가는 뚜렷하게 엇갈리고 있다.
서방권 매체들은 이를 글로벌 에너지 안보와 달러 패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규정한 반면, 중화권과 친러 매체들은 다극화 질서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으로 해석하고 있다.
먼저 블룸버그는 “페트로달러 체제의 균열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란이 해협 통행권과 위안화 결제를 연계한 조치를 ‘지경학적 인질 전략’으로 분석했다. 특히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설 경우,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시나리오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재무부 소식통을 인용해 ‘세컨더리 보이콧’의 전면 확대 가능성을 경고했다. 아울러 이란과 협상 중인 국가들에 일부 유럽 국가가 포함된 점을 지적하며, 이번 사안을 “서방 결속력을 시험하는 중대한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한발 더 나아가, 단순한 통화 갈등을 넘어 중국이 구축한 대체 금융 인프라—CIPS와 mBridge—의 확산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SWIFT 제재 전략이 오히려 대안 시스템을 촉진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중화권 및 친러 성향 매체들은 이번 사태를 ‘탈달러화’ 흐름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달러 중심 질서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주장하며, 위안화 결제를 강요가 아닌 ‘안정적이고 공정한 대안’으로 규정했다. 또한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고조는 미국의 제재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란의 조치를 주권 수호 차원의 대응으로 옹호했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 정부 입장을 반영해 “BRICS+ 국가들 사이에서 탈달러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이란 사례가 다른 산유국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제기하며, 일종의 ‘도미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동 및 아시아 매체들은 보다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란의 조치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주요 산유국에 미칠 파장을 분석하며, “사우디가 위안화 결제를 공식화할 경우 미국과의 안보 동맹 구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
니케이 아시아는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제조국들의 딜레마를 집중 조명했다. 해당 매체는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에너지 안보와 외교적 부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며,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충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이란의 ‘페트로위안’ 실험은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달러 중심의 단극 체제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위안화, 유로화, 그리고 디지털화폐 ( CBDC )가 얽힌 이 거대한 지경학적 변화는 21세기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호르무즈에서 시작된 이 작은 균열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세계 경제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다.







